파운드리 회사는 왜 서로 바로 대신 생산할 수 없는가

반도체 파운드리 산업을 처음 접하면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같은 파운드리 회사이고, 같은 2나노·3나노 공정이라면 한쪽에 자리가 없을 때 다른 회사에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반도체 산업에서는 이런 전환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는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파운드리 산업 자체가 서로 대체되도록 설계되지 않은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공정’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

파운드리 업계에서 “2나노”, “3나노” 같은 표현은 많은 분들이 정해진 규격의 제품명처럼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둘 다 2나노면 공정이 같고, 그럼 다른 회사도 똑같이 만들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2나노라는 말은 ‘세대’에 가까운 표현이지, 서로 호환되는 표준 규격을 뜻하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느낌입니다. “고급 스포츠카”라는 말은 같은 등급을 말해주지만, 브랜드가 다르면 엔진 구조도, 부품도, 정비 방식도 전부 다르듯이, 파운드리의 2나노 역시 회사마다 내부 구조가 크게 다릅니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설계와 공정 체계 위에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같은 ‘2나노’라도 파운드리마다 다음 요소들이 다를 수 있습니다.

  • 트랜지스터 구조와 특성(전력·성능·발열 특성이 달라짐)
  • 배선(금속층) 구성과 규칙(선폭, 간격, 층수 등)
  • 공정 순서와 조건(어떤 공정을 어떤 순서로 처리하는지)
  • 설계 규칙(칩을 그릴 때 따라야 하는 규칙의 차이)

이 차이 때문에, A 파운드리의 2나노로 설계된 칩을 B 파운드리 2나노에 그대로 가져다 생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정리하면, “2나노/3나노”는 시장이 이해하기 쉬운 세대 표현일 뿐이고, 파운드리 관점에서는 각 회사가 가진 고유한 제조 플랫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같은 공정’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서로 대체 가능하다고 결론 내리기 어렵고, 오히려 이 지점에서 파운드리 전환의 장벽이 시작됩니다.

반도체는 설계 단계부터 파운드리에 묶인다

반도체를 다른 파운드리로 바로 옮길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칩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인 ‘설계 단계’부터 특정 파운드리를 전제로 설계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반도체 설계를 “회로도만 있으면 되는 작업”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설계는 특정 파운드리의 공정 환경에 맞춰 진행됩니다.

반도체 설계자는 단순히 “이런 기능의 칩을 만들자”라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파운드리의, 어느 공정에서, 어떤 규칙을 적용할 것인지를 먼저 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해당 파운드리가 제공하는 설계 규칙과 도구를 기반으로 설계가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TSMC 공정을 전제로 설계된 칩은,

  • TSMC가 정의한 최소 선폭과 간격
  • TSMC 공정에 최적화된 트랜지스터 특성
  • 해당 공정에서 검증된 표준 라이브러리

를 기준으로 만들어 집니다.

이 설계는 처음부터 “TSMC 공장에서 찍을 것”을 가정한 설계입니다.

이 상태에서 “그럼 이걸 삼성 파운드리로 가져가서 만들면 되지 않나?”라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는 미국 기준으로 설계된 건물을 한국의 건축 규정에 맞춰 그대로 짓겠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외형은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내부 규정이 다르면 구조 계산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파운드리를 바꾼다는 것은 설계 규칙을 다시 적용하고, 전력·속도·면적 특성을 다시 맞추고, 전체 설계를 다시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생산지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제품을 다시 만드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특히 첨단 공정으로 갈수록 이 문제는 더 커집니다. 미세 공정에서는 작은 설계 변경도 전력 소모, 발열, 신뢰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파운드리 변경은 단순한 옵션이 아니라 프로젝트 전체를 다시 시작하는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TSMC가 바쁘니까 삼성으로 옮기자”와 같은 선택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칩은 이미 설계 단계에서 특정 파운드리와 운명 공동체처럼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첨단 공정일수록 전환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이유

파운드리를 바꾸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설계 문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특히 첨단 공정으로 갈수록, 전환에 필요한 시간·비용·리스크가 동시에 커지는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보이는 선택이,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결정이 됩니다.

먼저 시간의 문제입니다. 첨단 공정에서는 칩이 실제로 정상 동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전력 소모는 예상대로 나오는지, 고온·저온 환경에서 문제가 없는지, 장시간 사용 시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지 등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파운드리를 바꾸면 이 모든 검증을 처음부터 다시 수행해야 하며, 이 과정에는 수개월에서 1년 이상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비용 역시 급격히 증가합니다. 첨단 공정에서 한 번의 설계 수정과 테스트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갑니다. 마스크 제작, 시제품 생산, 테스트 칩 검증 과정만으로도 상당한 자금이 소요되며, 실패할 경우 그 비용은 그대로 손실로 남습니다. 성숙 공정에서는 감당 가능한 수준이었던 시행착오가, 첨단 공정에서는 기업 전체의 수익성을 흔들 수 있는 부담이 됩니다.

여기에 리스크 문제가 더해집니다. 첨단 공정은 공정 조건이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동일한 성능을 목표로 하더라도 실제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능은 나오지만 전력 효율이 나빠질 수도 있고, 단기 테스트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장기 신뢰성에서 문제가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고객 입장에서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감수하면서까지 파운드리를 바꿀 유인이 크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는 이미 고속으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엔진을 주행 중에 교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차해서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있겠지만, 그 사이에 잃는 시간과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첨단 공정에서는 이 ‘정차 비용’이 지나치게 커지기 때문에, 처음 선택한 파운드리를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됩니다.

결국 첨단 공정으로 갈수록 파운드리 전환은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시간·비용·사업 리스크를 동시에 감수해야 하는 경영 판단이 됩니다. 이 구조 때문에 첨단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기술 경쟁만큼이나, 초기 선택과 장기 관계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마무리

파운드리 회사들이 서로의 물량을 바로 대신 생산할 수 없는 이유는, 특정 기업의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반도체 제조는 단순히 설비를 공유하는 문제가 아니라, 설계 단계에서의 선택, 공정 체계, 검증 과정, 그리고 장기적인 신뢰가 누적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공정 세대라는 표현은 시장을 이해하기 위한 기준일 뿐,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서로 다른 체계 위에서 움직입니다. 칩은 처음 설계될 때부터 특정 파운드리를 전제로 만들어지고, 첨단 공정으로 갈수록 그 선택을 되돌리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 리스크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커집니다.

이 구조 속에서 파운드리는 서로를 단순히 대체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각자의 생태계를 구축한 장기 파트너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파운드리 경쟁은 단기 가격이나 공정 숫자의 경쟁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신뢰와 선택을 축적해 왔는지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파운드리 산업은 기술 산업이면서 동시에, 선택이 쌓여 만들어지는 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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